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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ta è bella

Cheers~. 짠~. Salute~ 🥂🍾어제 오후,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된지가 20년이 넘은 언니와 통화를 했다. 언니의 쉰 다섯번째 생일 축하 목적의 통화였지만 결국 우린 또 대선이야기로 빠져버렸다. 나의 재외국민 투표를 늘 격려하는 언니… 내가 대한민국 여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내심(?) 응원하는 내 언니와 설레발 안되고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 늦추지 말자 ‘결기‘를 다졌다. 우리 자매가 정치적으로 심각한 상황이 되면 난… 웃음이 난다. 열살 터울의 언니는 나를 업어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언니와 정치적 성향이 같아 참… 다행이다… 참으로 좋다…이탈리아 작가 책에 빠져있다고.. 추천한다고 한 책을 오늘 샀다. 이재명 당선이 확정된 걸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점에 들렸다. 이..

나는 도시촌년으로 스물아홉 해를 보냈다. 영국에서 공부를 하며 처음으로 '수도' 혹은 '대 도시'가 아닌 서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시골 항구도시에 살아봤다. 어촌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항구도시 특유의 사람들이 나고 드는 번잡함이 있었기에 '시골'이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닫혀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게 뭐지? 여기 사람들 뭐지?'의 의문이 들었던 경험은 있었으나 그게 진짜 뭐지?를 생각하며 고민할 만큼 성숙한 나이의 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며 '대도시'에 가야겠어.. 를 외치며 교양과목으로 이수한 이탈리아어를 핑계 삼아 밀라노 이탈리아어 연수를 계획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귀국을 하기 전 3개월 밀라노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진짜 시골 촌놈 나의 베비라쿠아씨와 그의 가족 구성원 ..

재외투표차 밀라노에 다녀왔다. 나는 2012년 4월,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이번 21대 대통령 선거까지 총선, 대선 재외국민 투표를 했다. 빠짐없이 했다. 딱 한번 출산기간에 치러진 18대 대통령 선거를 하지 못했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 출산기간 나는 이곳 이탈리아 북동부 시골 마을 치비달레에 있었다. 밀라노까지 가는 길이 멀어, 몸을 푼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몸은 언감생심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피 눈물을 흘렸다. 내 한 표가 모자라서 그리된 것인가 자책도 했었다. 13년 후 다시 돌아온 이곳 치비달레에서 21대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기위해 밀라노행 새벽기차를 탔다. 지난 금요일은 이탈리아 철도 파업이 있던 날이었지만 운 좋게 구해진 표로 새벽 첫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가는 ..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La peccora smarritadi Eugenio Scalfari길 잃은 양의 질문스칼파리 2013년 9월 11일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신문의 7월 7일과 8월 7일 자에 게재된 두 칼럼에서 내가 제기한 질문들에 답변을 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가 그토록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장문의 글을 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길 잃은 양은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칼럼들 속에서 나 자신이 '무신론자'이고 "신을 찾지도 않으며", 단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자 다윗 왕 혈통의 유대인인 나사렛 예수의 행적에 오래전부터 깊은 관심을 두고 경탄해 왔다"라고 말했다. 그러고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이란 인..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Le risposte che i due Papi non hanno ancora dato di Eugenio Scalfari무신론자가 교황에게 묻는다 1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가 -스칼파리 2013년 7월 7일-여름으로 접어든 이번 주에 정계나 재계에는 새로운 소식이 없었다. 마테오 렌치 총리와 그의 반대자들 사이에 사소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내 눈에는 무익하고 소모적으로 비칠 뿐이다. 정말 새로운 상황은 이집트에서 발생하여, 근동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신문의 특파원들과 이런 문제들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그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저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오늘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교황의 회칙( 교황이 교리와 도덕, 규율적 문제에 관해 ..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서문혁명은 교황이 선택한 프란체스코(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 Francesco d'assisi, 1182~1226. 그리스도교의 성인으로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13세기 유럽의 사상,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젊은 나이에 '작은형제단'을 조직하여 청빈, 정결, 복종등을 규칙으로 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예수의 교훈을 실현하기에 전력했으며, 여기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비롯되었다. 모든 생물을 형제라 부르고 산천초목을 자매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도하였고, 예수와 같은 성흔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라는 하나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많은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지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았던 성자를 떠올..

시간이 흐르며 선호도가 바뀌는 경향이 있다. 전에 좋았던 것에 소홀해지는 것도 있고 관심 밖이었던 것, 더 나아가 좋아하지 않던 것인데 눈이 가고 손이 가는 것들도 있다. 음식을 꼽는다면 나물이다. 엄마가 늘 잔뜩 무쳐놓는 나물 식탁에 손도 안 대던 시간이 분명 있었는데… 요즘은 가장 그리운 음식이 나물류다.색도 그렇다.내겐 노란색이 선호되어 손이 가고 눈이 가던 색감이 아니었다. 세월호 노란 리본 때문이라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노란색에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11년이면… 꽤 오랜 시간이다. 노란색이 좋다.확신이 드는 것들이 점점 줄어드는 삶, 글쎄… 아마도… 잘 모르겠어… 가 주가 되는 삶 속에 존재하는 내게… 아마도… 앞으로, 계속, 변함없이 좋아할 것 같다는 강한..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오로지 국민학교로만 마친 세대는 1983년생까지고 국민학교 시절을 ‘경험’해 본 마지막 세대는 1988년 생이라고 한다. 국민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몇 장면 중 하나가 ‘국군 아저씨께 위문편지 쓰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로 자다. 참 많이도 썼고 답장도 참 많이 받았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기 친언니는 대학교를 다녔다. 우리 언니는 88학번이다. 언니가 입학한 대학의 그 해 건축과는 언니를 포함하여 여학생이 3명이었다. 언니의 과 친구, 선배들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늘 떼거지 남학생들이 우르르 우리 집에 왔었고 국민학생이던 나와도 잘 놀아주었다. 나와 종이인형, 바..

마음이 편할 날이 없는 시간이다.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풍경을 찾아왔지만, 이 멋들어진 풍경을 보는 아침도 한숨이 먼저 나오니… 사는 건 정말 고통의 연속인가 보다…주말이고 주중이고 광장으로 모여드는 한국의 시민들 소식도, 불길이 잡히지 않는 산불 소식도… 한숨을 몰아 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현 시간에 나는 무기력하다. 이 끝나지 않는 부채의식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도 두렵고 무섭다. 할 일이 태산인데… 가장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손에 잡는다. 가장 나중에 해도 된다는 것은… 즐기며 하고 싶은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마음껏 즐길 수는 없지만 기분이라도 전환하고 싶은 마음, 이것에 몰두하며 피식이라도 웃을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오래전에 선물 받은 조각보를 ..

2002년 한 여름, 이름도 낯선 이탈리아 북동부 한 시골 마을에 들어섰다. 사랑이었다. 그도 그의 가족도 그의 마을도, 내겐 진정 사랑이었다.2025년 난 이 마을 정식 주민이 됐다. 이십삼 년의 시간, 여전히 그 사랑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책임과 애증이 더해져 농도가 짙어진 사랑이 되었다.지난 15년간 바쿠, 모스크바, 민스크 그리고 암스테르담 그렇게 네 도시를 거쳐 살았다. 이동에 대한 결정은 통보였다.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의 시간이 주어진, 욕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던 그 이동의 목적은 ‘노동‘이었다. 남편의 노동이라 단정 짓고 싶지 않다. 그를 따라 이동했던 내 지난 15년간의 삶도 노동이었다. 지난 15년간 내 직업란은 ’가정주부‘였다. 비록 가족과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그 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