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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ta è bella
열번째 장 본문
2012/07/20 00:37
가까운 곳에 친정피붙이가 하나 없는 상황에 임신을 하게되는 여성이 안쓰럽다 느껴진 것은
온전히 경험에 의한 발언이다. 임신은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며 경험해 보지 못한 신체의 대변화를 지켜보는 그야말로 스펙타클 울트라 체험이다. 스펙타클 울트라 체험을 하며 미우나 고우나 내 핏줄의 연을 맺고 있는 식구들이 그리운 것은 옹알이를 하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기를 고스란히 보아온 그들이, 입덧을 하고 우울함에 괴로워하며 배가 불러오는 임신의 경험기에 놓여있는 딸에게, 누나, 언니 혹은 여동생에게 느끼는 다른이름의 애틋한 감정이니 이 세상의 어떤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어머니가 딸을, 큰언니가 막내 여동생을 보며 느끼는 것은 아버지나 남자형제 혹은 동생의 입장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는 부모의 가르침에 반문이 생긴적이 있었다.
사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경쟁의 상대, 성장과정 속에 가장 가까운 비교의 상대인 그들이 서로를 위하고 양보하며 온건히 사랑의 마음으로만 대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을 제쳐놓은 체 너희는 자매이니 형제이니 무조건 우애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받든다는 것은 때로는 억지스러움을 강요당하는 고난의 시간으로 다가올 확율이 높다.
나에게는 10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그녀는 나에게 처음부터 어른이었다. 유아기 시절 어머니의 품만큼이나 따뜻한 품을 아낌없이 내어준 다른 이름의 엄마였고 소년기 시절 다른 친구들이 갖지 못하는 장난감이나 학용품, 의류나 장신구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해준 자랑스러운 물주(?)였으며 청소년기 시절 미치도록 닮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니만큼만 해라''의 쓰디 쓴 소리를 듣게하는 어처구니 없는 자격지심의 상대였고 내가 갖지 못한 너무 많은 것을 이미 다 갖고 경험한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생각이 커지며 나와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 부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맹목적으로 사랑한,동경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 20대의 중후반을 거치며 나는 30대의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40대의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로 다른 두사람으로 만나 15년간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한 남자의 아내로 어느날은 전쟁터를 어느날의 고요한 깊은 산속 숲길을 그녀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내나이 열 아홉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그녀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이민1.5세대인 남자와 결혼을 결정했다. 이미 두 해전 잘다니던 직장을 접고 뉴욕에서의 유학길에 올라있던 시절 만나 연애를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2년여간 장거리 연애를 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유학길도 인정하지 못해 떨어져 있음에 아픔을 겪게 해 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민 거주자를 만나 내게서 멀리 멀리 떨어져 살겠다는 그녀의 말에 대성통곡을 하며 보낸 밤이 이제는 까마득한 옛 기억으로 남아 달콤하고도 쓴 웃음을 짓게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재의 나를 완성해가는 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사람은 내 언니였고,
이러한 삶을 살아볼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 준 이도 내 언니이다.
언니가 미국땅 뉴욕시에서 살아온 시간이 15년이 되어간다.
언니 덕분에 한국에서 대학시절부터 영국 유학시절 그리고 직장을 다닌 지난시절을 합산한 15년간 나 역시 이 도시를 빈번하게도 방문했다. 초창기 언니의 시민권 문제, 임신기를 거치며 고국인 한국에 들어오지 못함에 내가 언니에게 오게 된 횟수가 더 많아 진 것 같다.
2006년 여름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게 된 후 6년만의 발걸음이다.
그 육년간 나는 성장했고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픈 성장통을 겪었다.
그 성장기를 겪는 나를 조용히 지켜보며....
이제 제법 배가 부른 막내 여동생을 보는 현재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언니가 되어본 적 없는 막내 여동생으로 그 깊은 마음 알 길 없지만 엄마를 보러 가는 발길을 거두고 언니에게 온 일은 참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니가 있어, 그것도 10살이라는 짧지 않은 터울의 큰 언니가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