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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ta è bella
예배당과 나 본문
2012/03/05 15:11
# 많이 망설였지만...그래도 꺼내고 싶었던 ‘’My Baku life Story’’
-예배당과 나-
나는 개인적으로 논쟁의 장을 열 수 있는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그것이 가까운 사람이건 먼 사람이건 처음 본 사람이건 오래 본 사람이건 나에게는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공감대가 설 수 있는 수 많은 주제들을 바탕으로 수다를 떨 수 있다.
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맞장구를 치고, ‘그런 것이 있나요?’ 라고 상대의 말에 호기심을
내비출 수 있는 그런 훈훈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들 말이다.
이 세상에는 훈훈함으로 결론을 맺기 매우 힘든 주제가 있다. 바로 종교, 정치, 민족 이야기이다.
그것은 같은편(?) 이 아닌이상 결국 ‘’당신이 틀렸소”라는 말로, 사실 그닥 고상하기도 힘들게 끝을 낸다. 그러기에 그저 나는 논쟁을 만들지 않게…..민족문제를 제외하고는(솔직히 내가 한국인이면서 그래도 같은 조상과 같은 역사를 이어받은 북한인 편을 들지 전혀 관계 없는 미국인편을 들 수는 없지 않은가? 하다못해 내 남편인 이태리 민족과 한국인 민족이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생기다면 내 민족편이거늘….내가 외국에 나와 살며 만나게 되는 이들 중 가장 경멸하는 이가 북한에 대해 매우 아는 척하는 외국<특히 미국과 영국> 기자들, PHD 과정 연구원들이다. 이들은 본인들 만큼이나 부족한 지식의 주변인들까지 북한 전문가를 만든다.이들과의 교류는 나를 언제나 ‘쿨’하지 못한 ‘핫’한 인간이 되게 한다.)
종교와 정치이야기는 내가 공감하고, 배움의 자세로 거부감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대화가 아닌 경청을 한다. 어쩜 소심하기도 이기적이기도 하다 할 수 있는 내가 오늘 내 종교에 관해 이야기 하는 이유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와의 인연 때문이다.
나는 바쿠에 있는 로마카톨릭 성당에서 Baptism(세례), First Communion(첫번째 성체 배령), Confirmation(견진성사)을 모두 받았다. 이것들이 무엇인지는 로마카톨릭(천주교)에 대해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솔직하게 나도 전혀 몰랐고 이것을 받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잘 몰라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할 판이다. 내가 천주교로 개종(?)을 한다 함에 위에 나열한 모든 것들을 받는다 함에 가장 반대를 한 이는 내 남편이다. 그리고 조금 힘들어 하신 이 가 우리 친정엄마시다. 내 남편은 이탈리아인 이다. 이탈리아는 국교가 카톨릭이다. 국교라 함은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그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차별을 가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즘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국교를 배척한다. 배척이라는 단어가 너무 강하다면 관심을 주지 않는다로 정정하련다.
나는 지금의 내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이후 개종을 조심스레 결정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종교와 얽히고 설킨 내 과거를 풀어내야 할 것 같다.
내 친정의 외가 친가는 모두 기독교 가정이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그리고 나의 친정엄마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성경구절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교회로 새벽예배길에 오르던 분이였고, 사리가 옳고 판단이 정확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한 우리엄마는 유독 종교 앞에서 만은 약해지는 아니…. 억지를 쓰실 만큼 매우 강해지는 분이다. 우리 외할머니와 친정엄마의 이런 마음가짐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그건 너무 개인사라 내가 이곳에 모두 털어 놓을 용기는 없다.
어찌되었던 다행히 연세가 드시며 자식들의 이유있는 비판(?)에 귀를 여시고 수긍도 하시지만 여전히 우리엄마에게는 훌륭하고 대단한 기독교 신자들이 더 많다. 나는 이런 우리엄마가 좋다.
우리 엄마같은 사람이 있어야 그야말로 소신있는 개신교 성직자들이 또한 신자들이 설 자리가 생기고 그 소신을 접지 않고 투쟁하면서라도 지킬 것은 지키게 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시절 부터 교회 안에서 주일학교를 보냈고 중고등부 활동을 했다. 물론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고등학교 2학년이 후로 오랫동안 교회에 발길을 주지 않은 기간도 있었지만 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는 시간부터 가장 힘들다거나, 가장 기쁘다거나 할 경우 그저 가까운 예배당에 들어가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그 습관이라는 것이 내 감정의 사나움을 가라앉히고 기쁨의 호들갑 역시 차분해지게 해주는 것에 매우 큰 일조를 함에 그것이 종교활동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믿는, 내가 의지하는 신과의 소통 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만 스무살이 된 내가 호주의 시드니 땅에 정착을 하며 의지할 친인척 하나 없는 상황에 그것이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혹은 살아가기 위한 도움의 손길이 되었던 자연스레 의지하고자 찾아간 곳이 시드니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던 한인교회였다. 그곳은 나에게1년간 많은 도움을 주었던 동시에 떠나며 다음 정착지에서는 한인교회에 절대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했다. 그것이 교회였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외국에 나와 의지의 손길이 필요한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서로 받기만을 원해하는 이유에서 발생하는 수백 수천가지의 일들이 벌어지고 그것이 나중에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에게 까지 해를 입힌다는 매우 슬픈결과를 가져온다는 현실을 바라보자 청하고 싶을 뿐이다.
시드니에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인교회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영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기숙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 나가게 되 얼마 되지 않아 내가 한국에서 다닌 교회와는 무언가 조금 혹은 많이 다르다 생각들어 봤더니 한때 영국의 국교회 였던 성공회였다. 성공회는 16세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갈려 나와 영국의 국왕을 수장으로 하여 성립된 교회를 말한다.)
솔직히 오래된 예배당이 너무 예뻐 발길을 주기 시작했다하면, 성직자분의 출중한 외모와 마치 BBC 뉴스 앵커 같은 정확하고 또박또박하여 매력적이기까지한 그의 영어에 반해 나도 모르게 한 주를 기다리게 되었다 고백한다면….(솔직히 그 당시 학과 친구들의 온갖 속어 섞인 남부 항구도시의 억양에, 기숙사 유럽친구들의 억세디 억센 모국어 억양에 이 세상에는 영어라는 이름의 수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구나를 몸소 체험하던 참이였다.) 돌맞을 일이 될 수 도 있겠지만…
그. 이. 유. 가. 영국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예배당에 가게 된, 주말 알바 일요 근무 시간을 예배(?)보러
가야 하니 한시간 뒤로 미뤄주기를 부탁한다고 면접시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하게 된 이유였다고 솔직히 고백하련다.
젊은이 하나 없는 교회에 백발의 할머니들만이 자리를 채운 그 교회에서 나는 그분들과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할머니들의 정신없는 수다에 섞여 많이 웃기도, 따뜻한 햇살 내리쬐는 어느 오후 내 마음을 몽땅 빼앗아 간 그 성직자분과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교회 벤치에 앉아 햇살 쬐는 것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리고……어쩜 가장 중요한… 내 중심에 신을 모셔 두는 것에 허락을 구한,
너무도 나약한 나이기에 내 중심에 그 신을 모셔두는 것 만이 조금 덜 악하게, 조금 덜 어리석게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와 영국에서 다진 생각의 시간들은 건전지 나간 시계마냥 더 이상 분침도 초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고 싶고 올라서고 싶은 시계들만 바쁘게 움직였다.
삶이 빡빡하다 보니 부패한 성직자들 특히 한국 교회의 만연한 횡포는 씹기에 가장 고소한 주제였고 그건 신과 나 사이 라기 보다는 한국 교회와 나 사이의 거리감으로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계기가 되어 돌아왔다.
2009년 2월 한국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지 5년만에 다시 짐을 쌓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다짐까지 한 것 같다.
이탈리아의 북부도시 베로나. 나는 그곳에서 근 10개월간 철 만난 베짱이 마냥 알 수 없어 두려운 미래도 잠시 잊고 그야말로 마냥을 놀았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예배당를 만났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베로나 두오모 성당이 있었고 그저 기대 없이 예쁜 예배당에 (난 예쁜 예배당에 끌리는 낭만적(?)인 인간인가보다) 들어 섰고,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는 성당시스템이 좋았다. 아마도 유명 관광지 였기에 수없이 문턱을 밟고 지나는 객들 덕분에 나 같은 동양 여인네 하나 매주 들락 거려도 매주 다른 여인네로 착각 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에 더하여 유명 관광지의 돈많이 들이는 두오모 성당인 만큼 일요 대 미사 시간 오르간 연주는 매주 오케스트라 공연관람을 방불케 할 만큼 대단했다. 이런 이유들은 아무때고 심심해도, 우울해도, 외로워도,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어 죽을 만큼 힘겨워도 성당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해 11월 아제르바이잔 바쿠행을 결정했다.
내가 한국에서 이태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쯤 당시의 남자친구, 현재 내 남편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제르바이잔 발령이 났고 보내질 당시에는 공사의 끝을 봐야하는 지령은 없었었으나 6개월 후 ‘공사의 끝을 보게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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