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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ta è bella
예배당과 나 그리고 결혼식 본문
2012/03/06 20:32
# 많이 망설였지만...그래도 꺼내고 싶었던 ‘’My Baku life Story’’
-예배당과 나 2-
당시 식을 올리지 않은 상태의 우리를 한국의 여느 평범한 가정이 그렇 듯, 강하게 표현하지는 못하셨으나 반대의 뉘앙스 ( 나는 우리 집에서 막내이나, 내가 내는 결정에 강하게 반대를 나서는 가족 구성원은 없다. 그건 아마 자신의 결정에는 스스로의 책임이 따른다는 가족 구성원들의 암묵적 가치관에서 인 것 같고, 나를 믿어준다는 감사한 암묵적 동조인 것 같다고 ….그저 한번도 물어본 적 없는 이기적 관점의 결론이다.) 를 비추셨고, 그 덕에 걱정의 태산을 만들어드렸으나 9년이 넘게 그것도 그 9년의 기간 중 4년간 1년에 한번 꼴로 만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서로의 사랑인지 우정인지를 보시며 감동 아닌 믿음이 있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찐한 스토리는 현재의 내 남편을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내신 한 상사분의 인정 넘치는 배려로 약혼자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아제르바이잔에 그런 비자 없다. 아마 그 당시 윗선에 잘 말해 곧 결혼할 아이들인데 애절한 아이들이니 비자 안내주면 베비라쿠아 혼란의 시기, 일에 열중 매우 불가능한 시기가 올 듯하니 비자 어떻게든 내주라고 지시하셨던 것으로 아는 이들은 그리 알고 있다) 이런 복합적 상황에서도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은 그 남자가 지금의 내 남자로 내 옆에 있다.
결혼식 준비과정에서 왔던 수 없는 내면의 갈등과 화풀이 상대로서의 유일한 한사람 베비라쿠아씨에게 미안한 마음, 적응하기 매우 힘들었던 초창기 이곳 바쿠에서의 생소한 모든 것들은 하루에도 열두번 아수라 백작의 공연으로 그에게 보답(?) 했기에 나도 그도 진정시킬 곳이 필요했다.
우리는 그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바쿠 시내에서 그리 멀리 않은 카톨릭 성당을 찾았고 그 호기심과 기대는 긍정의 에너지로 우리의 성난 마음, 생소한 환경에서 오는 모든 근심을 가라 앉혀 주는 안식처가 되었다.
바쿠의 카톨릭 성당은 매우 다양한 국적의 인종이 모인다. 아제르바이잔인, 러시아인, 영국인, 미국인, 이탈리아인, 남미인(콜롬비아, 브라질 등)인도인, 중동인, 아프리카인 그리고 성당의 대소사에 모든 일들을 도맡아 봉사활동에 앞장서는 필리핀인들 이다. 나는 바쿠에 그렇게 많은 필리핀인들이 모여사는지를 성당에 가 알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다양한 인종이 모여 종교활동을 하다보니 로마카톨릭이기는 하나 각자의 나라 고유의 그 무엇인가를 조금씩 섞는 재미난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쿠성당에는 필리핀인들과 흑인 내지는 남미인들을 위주로 성가대가 구성되어 그들만의 천상의 목소리로, 연주로 영어미사 내내 아름다운 선율이 성당을 가득 채운다.
또한 러시아어 미사에는 반주없는 성가를 가슴 떨리게 부르는 아제르바이잔인 혹은 러시아인 신자들이 있어 듣고 있는 동안 이유 모를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폴란드 출신의 신부님들은 건장한 체구에 조각같은 외모로 장난기 가득한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웃음과 미소로 엄숙,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친근함의 편안함을 전한다. 초창기 그렇게 매 주는 아니어도 가끔 성당으로 발길을 주게 된 우리 부부는 갈때마다 항상 마음의 안식을 얻고 돌아오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이슬람의 국가에서 공식적(?) 허가(?) 를 받고 문을 열 수 있는 종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상황도 그닥 다르지만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중 불편한 현실과 만나지 않아도 되는 교회 중 하나가 로마카톨릭 성당이다. 내 남편과 내 시댁 식구들은 성당에 매주 나가는 신실한 신자들이 아니다. 우리가 이태리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고자 결정 한 후, 우스개 농담을 한 것이 있다. 남편은 결혼식 전, 그의 가족들에게 미리 미사보러 몇번 다녀오시라 간곡히(?) 청을 올렸다, (결혼식은 미사를 드리는 그저 경건한 결혼예배라고 설명하는 것이 쉽겠다) 결혼식 미사 중에 어느때에 일어서고 앉으며, 신부님의 말씀 후에 언제 모두가 일제히 대답을 해야하는지 등 미리 알아야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는 이유에서 였다. 물론 그 이유로 내 시댁가족이 미사 드리는 연습(?)을 하러 성당에 가게 되는 상황까지 연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가 오가는 내내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 나에게는 어린시절 부터 작은 소망하나가 있었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외국의 어느 시골마을 몇백년된 작은 예배당에서 올리는 조촐하지만 달콤한 결혼식. 그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는 것 이었다. 그것을 현실의 꿈으로 꾸게 만든 것은 베비라쿠아씨의 고향집을 처음 방문한 때 였다. 이태리의 시골은 영국의 시골과는 또 매우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외국의 오래된 흑백 영화의 배경에서 본듯 한, 어린시절 동화책 속의 삽화 그림으로 본 듯한 그런 풍경들 말이다. 새로 지어진 것은 찾아보기 힘든, 무엇이든 얼마나 오래되었나의 질문에 별로 오래된 집 아니라는 아이스크림 집은 60년, 들어서는 문에서 부터 감탄이 나는 피자가게는 100년, 성당들은 150년 에서 500년………
새롭고 화려한 것이 현대적이라는, 낡고 지저분한 것이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당시의 나에게 그곳은 내가 얼마나 틀린 가치관과 편견으로 사물을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았는가 깨닫게 해주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수도 서울을 처음 방문한 베비라쿠아씨는 두 손과 인중에 멈추지 않는 식은 땀을 어찌 할 줄 몰라 당황해 할 만큼, 빼곡하게 높게 들어선 멋진 빌딩들을 보며 호흡 곤란이 올만큼 현대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우린 참으로 다른 환경에서 나와 다른 가치관으로 스무해를 살았고 서로의 것이 가장 훌륭하다 생각한 스무해는 만난지 네 해만에 뒤바뀌었다.
그리고... 그 인연의 결과 너무도 다른 둘이 만나 십년 의 세월을 거쳐..... 현재 이리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
어찌되었던 양가 직계가족과 절친한 친구만을 초청한 우리의 결혼식은 이태리 북부 이름도 낯선 어느 시골마을 200년 전 지어진 아주 작은 성당에서 매우 조촐하지만 경건하게 치뤘고 내 꿈은 그렇게 이. 루. 어. 졌. 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바쿠의 카톨릭 성당에 마음을 주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쯤 결혼식 장소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결정한 우리는 이태리 고향집의 마을 신부님을 찾아갔다. 매우 권위적이시고 원칙과 정석을 행동으로 보이시는 신부님은 우리의 성당 결혼식을 부정적으로 보셨다.
이유는 이러했다.
첫번째 현재 마을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고 있다.
두번째 베비라쿠아씨가 Confirmation(견진성사)를 받지 않았다. 카톨릭에서 견진성사를 받지 않은 이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할 수 없다. 이탈리아는 대부분 15세에서 17세 사이에 견진성사를 받게 되는데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어렵고 지루한 오랜 과정을 거쳐 받게 된다는 이유로 최근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견진성사를 받지 않는다. 참고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할 시 양쪽에 한명씩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 내 증인은 베비라쿠아씨의 여동생이, 베비라쿠아씨는 그의 오랜 절친이 서게 되었는데 그 둘은 우리의 결혼식 증인을 서기 위해 6개월 과정을 거쳐 견진성사를 받게 된 해프닝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을 해줬다.
세번째 혼배성사 6개월 과정이 이행불가하다.
네번째 외국인 신부 즉 내가 카톨릭이 아니다. 네번째 항목은 고맙게도 무슬림을 제외한 다른 종교인은 결혼식이 가능하나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매우 많으며( 예를 들면 결혼 후 나의 남편을 내 종교로 개종시키지 않겠다는, 둘 사이에서 나온 2세들은 반드시 로마 카톨릭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카톨릭의 종교안에서 키우겠다는 서약서들이다.) 그저 성당에서의 결혼식만이 허락이지 결혼예배는 드리지 않는다이다. 결혼예배가 빠진 성당의 결혼식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는 그야말로 의미없는 식 이된다는 이야기인 것 이다.
신부님을 찾아뵙고 나온 그 날 나는 정말이지 많이도 울었다.
아무것도 쉽지 않은, 꼬이고 엮인 모든 이유에 화가 났고, 내맘 같지 않은 상대들이 그저 싫었다.
이탈리아는 결혼식을 하는 장소가 두 곳으로 정해져 있다. 한곳은 위의 조건을 모두 갖춘 이들이 할 수 있는 성당 그리고 시장(혹은 구청장 등 그 지역 관청의 최고 책임자) 앞에서 15분간의 서약 및 서명을 하는 비교적 매우 간단한 형식의 관청 결혼식이다. 관청에서의 간단한 형식의 결혼식은 멀리서 오시는 내 가족앞에서 면목없는 식이라는 이유로 베비라쿠아씨의 완강한 반대의견이 있었고, 그럼 시댁 식구가 모두 서울로 가 한 호텔에서 치루자는 (치루는 값에 따라 초호화 결혼식도 초라한(?) 결혼식도 가능한) 시댁의 의견에는 내가 반대를 했다.
2주간의 달콤 그리고 매우 씁쓸한 휴가를 마치고, 결혼식에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우리는 바쿠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성당, 담당 신부님을 찾아가 베비라쿠아씨는 Confirmation(견진성사)을 나는 성인 세례 (Baptism(세례), First Communion(첫번째 성체 배령), Confirmation(견진성사) 한번에 받는 것)를 그리고 함께 혼배성사를 준비하고 싶다고 의논했고 그렇게 우리는 1년간의 긴 준비과정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도 꼬장꼬장하니 우리를 시험하신 베비라쿠아씨의 고향 신부님 앞에서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긴 서약서를 읽으며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보시며 어찌 할 줄 몰라 얼굴까지 창백해지시며 당황해 하시던 순수하고 신앙심 깊은 그 신부님 앞에서,
1년간 나만큼이나 마음 고생한 내 친정가족 앞에서,
1년간 우리를 대신해 모든 서류준비를 비롯해 자잘한 모든 준비를, 그 수고를 모두 대신 해주신 시댁식구들 앞에서,
우린 혼. 인. 서. 약. 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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